괴물이 피는 숲
written by 가은
그 여자를 처음 본 건 어느 눈 오는 날이었더랬다. 순백이 어둠을 집어삼킬 것처럼, 하얀 눈이 그녀의 맨발목까지 차오르던 날. 그 숲에서 그녀를 본 사람이라면 모두 입 모아 말했다. 아, 그 자태는 꼭 설화 같았지. 혹한을 딛고 의연히 눈튼 꽃송이 같은 맵시였어. 희고도 기다란 머리칼은 바람에 흩어질 때마다 윤기가 났고, 녹색 눈동자는 새잎을 겹쳐 놓은 모양새였다. 까스러진 발은 이미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먼 길을 지나온 듯했다. 까마득한 숲 속에서 그녀의 유일한 향도는 야천의 별빛이었다. 몇 안 되던 별들이 걸음을 옮길수록 불어나더니 차츰 수가 꽤 되었다. 그쯤, 저만치 희미하던 빛 하나가 뚜렷해지며 가까워왔다. 그 빛은 별이 아닌 누군가의 횃불이었다. 그들은 사냥을 나왔는지 두꺼운 망토를 두르고, 허리춤에 총을 맨 차림이었다. 그들은 그녀에게로 다가와 어깨에 두르고 있던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녀의 체온을 확인하고, 따뜻한 물로 목을 축이게 했다. 조금 더 걸으니 인적이 느껴지는 공간과 목조 주택들이 보였다. 그들은 길 끝에 있는 작은 마을로 여자를 부축해 데려왔다. 이름을 묻는 말에 그녀는 간결히 대답했다.
리브.
음절의 틈으로도 단단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대체로 다정하고 호의적인 태도로 리브를 도왔다. 본디 그들은 이방인에 대한 경계가 심한 편이라고 했다. 리브는 신원 모를 인물이었지만, 그들의 시선에 여리고 힘 없는 여성으로 비춰져 연민을 샀다. 리브는 마리라는 과부의 오두막에서 머무는 대가로 그녀의 일을 거들었다. 마리는 소규모로 여성 의복을 만들어 파는 의연하고 근면한 중년이었는데, 마을과 마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꼭 아이처럼 얼굴이 환해졌다. 밤하늘 마을이라고 부르는 작지만 아름다운 마을. 이 근방에서 이곳만큼 많은 별이 관측되는 곳은 없다고 했다.
소란한 오후, 리브는 식탁에 앉아 마리가 가져다주는 튜닉에 끈을 얽어매고 있었다. 수상한 소음에 창 가까이 다가온 마리의 얼굴이 신경질적이었다. 웬 소란인지.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리는 마리의 목소리에 리브도 시선을 옮겼다. 분주하게 서성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보여지는 풍경이 온통 떠들썩했다. 마리는 창문을 열어 무슨 일인지 묻더니 금방 어두워진 낯빛으로 겉옷을 챙겨 입었다. 쥐고 있던 바늘과 옷가지를 내려놓은 리브도 마리를 따라 바깥으로 향했다.
마을 중앙에는 사람들이 쓰러진 태오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는 스물을 갓 넘긴 젊고 유망한 사냥꾼이었다. 리브도 멀찍이서 얼굴을 살피곤 그가 자신을 구했던 주민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몇몇의 곡성과 탄식이 서글피 울려퍼졌다. 인파를 가로지른 리브는 태오 곁으로 다가가 찬찬히 그의 상처를 살폈다. 가슴팍부터 복부까지 상처가 깊게 이어져 있었다. 리브의 손이 그의 상처 위를 쓸어내리자 당황한 이들이 그녀를 저지하려 했다. 순간, 리브의 살결이 비늘처럼 윤이 났다. 그녀의 손이 닿은 자리에 빠른 속도로 새살이 솟았다.
그것이 리브가 행한 첫 기적이었다.
시든 풀들은 소생했고, 나병 환자는 대번에 온전한 신체로 회복했다. 아픈 구석이 있다 하면 줄줄이 그녀에게로 모여들었다. 십중팔구는 리브의 존재에 환희했다. 수려한 외모 때문에 리브를 마음에 두는 사내도 간혹 있었지만, 이는 암묵적으로 금기시되곤 했다. 그녀가 신성한 여성으로 남길 원했기 때문이다. 허나 일각에는 그녀를 석연치 않게 바라보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대개는 정치인이거나, 그 여파로 손님을 깨나 잃은 의료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도 마을을 구제한 그녀를 몰아낼 명분은 마련할 수 없었다.
오후가 늦도록 리브가 일어나지 않았다. 마리는 그녀가 몸이 좋지 않거나 피곤한 모양이라 생각하곤, 리브와 함께 먹으려 훈제 청어와 포멜로 절임을 준비했다. 이내 마리는 계단을 올라 그녀의 방문을 수차례 두드렸다. 조심스레 문을 여니 리브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곁에는 리브의 허리께까지 키가 닿는 남자아이 하나가 있었다. 리브는 그 남자아이를 자신의 아들이라고 소개했다. 류라는 이름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았지만 이번 일은 사안이 컸다. 류가 태어난 경위에 대해 물었으나 리브는 대답이 없었다. 그토록 신성시되던 리브가 하루아침에 아이를 가졌다니, 제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좁은 마을에서 그녀를 질시하던 사람들의 귀까지 이야기가 새는 건 금방이었다.
한 주교가 방문한 뒤로 흉흉한 소문에 불이 붙었다. 옆 마을엔 마녀가 있대. 마녀 때문에 역병이 돌고 있대.
부정의 기운은 빠르고도 강하다. 그것은 으레 나약한 이들에게 더 짙게 작용한다. 표적을 찾던 시선이 리브를 향했다. 아픈 이들의 병든 정신은 리브에게 죄를 물었다. 저 여자가 영웅 노릇을 하려 우리에게 병을 줬다고. 그녀가 가진 형용할 수 없는 능력은 한때는 구원이었고, 현재는 헌납하기 쉬운 제물이었다. 그녀의 희생은 빈곤한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빛을 보게 했다.
의심은 맞붙을수록 부푸는 성질이 있어 끝없이 꼬리를 물었다.
그녀는 어디에서 왔을까? 매섭던 겨울이었는데, 맨발에 거적 같은 옷 하나 걸치고도 왜 죽지 않았을까.
어느새 그녀의 신성함은 수상함으로 변질했다. 사람들은 리브를 멋대로 추앙하고 멋대로 추락시켰다. “리브가 정말 마녀일까? 그렇지만 리브는 우리를 해친 적이 없는걸.” 그런 말을 뱉는 순간 마녀의 수하라는 낙인이 찍혀 처형 대상이 됐다. 개인의 안위 앞에서 진실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리브의 능력을 경험한 이들마저 마녀의 간계에 홀린 것이라 뭇매를 맞자, 합세해 리브를 마녀로 몰았다.
가장 의아한 대목은 류의 탄생이었다.
처녀인 리브와 이상하리만치 조숙한 그녀의 아들. 돌연 낳게 된 아이라기엔 충분히 성장한 소년이었다. 마녀의 핏줄이라면 분명 주술을 욀 수 있을 거야. 금방 키가 멀대같이 자라 허기진 배를 주민들로 채우고, 평온하던 마을에 피바람을 불러올 거야.
마녀가 괴물을 낳았다.
사람들은 리브와 류의 화형에 대해 모의했다. 겁에 질린 주민들 대부분이 찬성했다. 리브는 자신의 처형에 있어 한마디도 첨언하지 않았지만 류를 벌하는 것만은 항변했다. 더 정확히 서술하자면 죽음의 대가로 아이만은 살려 둘 수 없겠냐 애걸했다. 잔꾀로 치부하기엔 야윈 몰골이 퍽 처절했다. 제아무리 절실한 부탁인들 탐욕에 번뜩이는 눈들이 류를 매질하지 않을 리 없었다.
화형식 전야의 부엉이 울음소리가 짙고 낮았다. 불안의 기운이 뭍바람을 타고 번졌다. 마지막 밤은 그녀가 본래 살던 방에서 류와 함께 보내게 두었다. 낡은 나무문은 철쇄로 잠겨 있었고, 리브와 류의 몸은 무른 밧줄로 묶인 채였다. 그녀의 품 가까이 몸을 뉘인 류가 나직히 물었다.
왜 저항하지 않아요?
잘못에서 자유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류는 리브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애석하면서도 답답했다.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고도 자신의 몸 하나 방위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랬다. 리브는 류의 내리깐 눈에서 자명한 적의를 엿보았다. 새벽이 깊어 바깥이 고요해지자, 리브는 다급히 침대에 누인 몸을 일으켰다. 곧 묶인 몸을 끌어와 나무 침대 모서리에 매듭 지어진 부분을 문댔다. 헐겁게 묶여 있던 밧줄은 금방 풀어졌다. 리브는 빼낸 손으로 류의 등 뒤로 묶인 밧줄을 풀고, 문을 살짝 열어 보초의 잠든 얼굴을 확인했다. 도로 문을 닫은 리브가 창틀 위로 올라가 류를 향해 손 내밀었다. 리브의 흰 손을 맞잡은 류가 창문 아래로 뛰어내렸다.
두 사람이 추락하며 굉음이 울리자, 잠들었던 마을에 다시금 파문이 일었다. 깨어난 이들이 리브의 이름을 외치며 두 사람을 쫓았다. 리브와 류는 꼭 머나먼 시간부터 웅크려오다 겨우 펼쳐진 무언가처럼, 양팔을 뒤흔들며 하염없이 달렸다. 뜀에 박차를 가할수록 숨통이 조여왔다. 숨통이 조일수록 둘을 뒤쫓는 엽수들의 고함 소리는 가까워졌다. 리브는 숨이 모자라 헐떡이는 류를 숲으로 밀어넣었다. 곧 자그맣던 싹들이 급속도로 뻗어나 류의 몸을 감쌌다. 류가 리브를 붙잡으려는 듯 몸을 기울였지만, 단단한 덤불이 그를 포위했다. 얽힌 덤불 틈새로 보여진 광경, 폭력적인 횃불들 한가운데 리브가 연행되고 있었다. 벌어진 입으로, 류를 응시한 채로. 류의 비명이 틀어막은 손바닥 뒤로 먹혀 들어갔다.
해도 다 뜨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광장이 분란했다. 사람들이 장작을 패고, 어깨에 짚더미를 얹어 날랐다. 남자들은 힘을 합쳐 두꺼운 나무 형틀을 짚 사이로 꽂았다. 여인들은 만신창이로 끌려온 리브의 양팔을 붙들고, 형틀에 가까이 세워 다시금 밧줄을 고정했다. 밧줄이 조여들어 살이 허옇게 질리는데, 아픈 내색 하나 없는 리브를 보며 모두가 입 모아 마녀가 확실하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녀를 더욱 거세게 비난하며 속내에 피어오른 죄의식을 지웠다. 주민들은 나무 토막에 기름 묻힌 헝겁을 둘러 나눠 가졌다. 의식을 하듯 원을 그리며 리브를 에워싸고 차례대로 불을 붙였다. 마지막 발화는 리브의 발 아래였다.
다른 방향에서 느껴지는 화기에 리브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두고 왔던 류였다. 류가 양팔을 벌리자 홧홧한 바람이 일었다. 류의 온몸은 꼭 발화하듯 머리카락과 살의 일부가 재로 변해 으스러졌다. 사람들은 열기에 휘청였고, 류의 빨갛게 물든 눈은 주위 어떤 횃불보다도 붉었다. 타들어가던 류는 점차 괴물의 형체로 변했다. 사람의 행색을 한 마녀가 아닌, 여느 그림책에 나오던 괴물과 일치하는 모습으로 몸집을 키웠다. 류가 손짓하는대로 불이 붙었다. 사람들은 고통에 몸부림쳤고, 그토록 아름답다던 마을의 광경은 불길에 일소했다. 류는 리브를 옥죈 밧줄을 떼어내 그녀를 끌어안았다. 열기에 뒤덮인 마을은 검붉은 연기 속에 몰락하고 있었다. 둘은 폐허가 된 마을을 뒤로 한 채 멀어져갔다.
불길이 가신 자리에 기필코 생명이었던 것들이 무참하게 저문다. 잿더미 사이로 고개 내민 이름 모를 흰 꽃이 흔들리고 있었다.